“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면 나는 시간을 안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묻고 설명을 요구한다면, 나는 알지 못한다.”
1600년 전, 북아프리카의 한 고독한 영혼이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스마트폰 스크롤에 영혼을 잃고, '워라밸'을 외치며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자신의 대표작 『고백록』에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간의 본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가 시간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 핵심 통찰 정리
•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기대로, 현재는 집중(직관)으로 존재한다.
• 찰나의 현재를 붙잡고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하는 신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시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열쇠다.
2.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중, 당신의 현재를 가장 많이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3. 디지털 시대의 '시간 빈곤' 속에서, 당신의 '현재'를 온전히 누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황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적인 탐구와 육체적 쾌락 사이에서 갈등했고,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기독교로 개종하는 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와 창조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고, 이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난제와 마주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신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시간'에 대한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신의 창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그를 시간의 본질에 대한 더욱 깊은 탐구로 이끌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11권에서 시간의 문제에 몰두합니다. 그는 "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과거는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찰나에 사라진다는 사실에 깊은 혼란을 느낍니다. 이 고민은 그의 실존적 불안과 영적인 갈증이 집약된 순간이었고, 결국 시간은 외부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영혼 안에서 경험되는 '늘어남'이라는 통찰로 이어졌습니다.
시간은 '영혼의 늘어남(distentio animi)'?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강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시간의 세 가지 양태와 영혼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찰나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 과거: 기억 (Memoria) - 우리는 과거를 '기억'이라는 정신 작용을 통해 경험합니다. 이미 사라진 사건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각인되어 남아있는 것입니다.
- 미래: 기대 (Expectatio) -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나 '예상'이라는 정신 작용을 통해 경험합니다.
- 현재: 집중 / 직관 (Intentio / Praesentia) -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현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를 '찰나'가 아닌 '집중' 또는 '직관'의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여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입니다. 마치 한 곡의 음악을 들을 때, 이미 들은 음(과거)과 아직 들을 음(미래)을 동시에 기대하며 현재의 음에 집중하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 시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정신 작용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늘어나고 펼쳐지는 경험' (distentio animi)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대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바로 그 과정이 곧 시간의 본질이라는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길고 긴 연설을 듣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이미 들은 부분(과거)을 기억하고, 앞으로 들을 부분(미래)을 기대하며, 현재 듣고 있는 부분(현재)에 집중합니다. 이 전체적인 경험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시간'입니다. 연설 자체가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연설을 듣는 나의 의식이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그 과정이 바로 '시간'인 셈이죠.
이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혼의 늘어남'으로서의 시간은 우리가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을 경험하는 주체임을 일깨워줍니다.
소셜 미디어의 끊임없는 알림, 멀티태스킹의 요구,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우리의 '현재'는 조각나고 희미해지기 쉽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현재'에 대한 '집중'을 통해 비로소 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현대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또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눈앞의 커피 향에 집중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여보세요. 과거의 실수에 얽매이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봅시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방법이며, 우리 영혼을 온전히 '늘어나게' 하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서양 철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시간을 대체로 '객관적인 실체'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시간을 '운동의 수(數), 또는 선후 관계에 따른 운동의 척도'로 보았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물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외부적 변화를 통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죠. 반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시간을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으로, 어떤 외부적 사건과도 관계없이 그 자체로 흐르는 보편적인 실체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과 달리 시간을 '인간 영혼의 경험'으로 내면화시켰습니다. 시간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그의 통찰은 이후 근대 철학의 주관주의와 현대 현상학, 심리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세기 들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이 '시간의 상대성'을 이야기하며 관찰자의 영향을 강조한 것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과 미묘하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시간을 창조했으므로, 신은 시간이라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영원한 '지금'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존재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영혼의 늘어남'이므로,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는 길이'를 측정하는 행위와 더 가깝습니다. 즉, 측정은 '외부의 움직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심오하고 복잡한지를 보여줍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숫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영혼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경험되는 실존적인 현상입니다. 그의 통찰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현대인의 강박에서 벗어나, 시간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지배하려 애쓰기보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 영혼의 춤에 더 집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찰나의 현재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1600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경험한 '시간'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과거의 나', '미래의 나'를 떠올리며 '현재의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봅시다.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