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입니다. 쌍둥이라 할지라도,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할지라도, 당신은 분명히 '당신'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반려동물도, 길가의 작은 풀꽃 한 송이도,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도, 모두 각자의 '이것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혹은 그 풀꽃 한 송이를, 수많은 '인간'이나 '풀꽃' 중에서도 콕 집어 '이것'으로 만드는 걸까요? 어떤 원리가 개별 존재를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거장이자 '미묘한 박사(Subtle Doctor)'라 불렸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 개별성의 비밀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그가 포착한 '이것성(Haecceity)'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둔스 스코투스, '이것성'의 철학 핵심 통찰
• 이는 존재의 보편적인 본질(무엇인가)과는 별개로, 그것을 '바로 이 존재'로 만드는 긍정적인 '덧붙여진 형식'입니다.
• 이러한 개별성의 철학은 존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현대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성을 탐색하는 데 중요한 사유의 토대를 제공합니다.
2.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가 '이것성'을 지닌다면,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3.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지능과 감성을 가질 때, 그들에게도 '이것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둔스 스코투스는 왜 '이것성'을 고민했을까?
13세기 말, 파리 대학교에서 이름을 떨치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둔스 스코투스는 당대의 가장 첨예한 철학적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바로 '개체화 원리'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것(인간성, 말의 본질 등)에 집중했지만, 스코투스는 '바로 이것'이라는 개별 존재의 특별함에 주목했습니다. 똑같은 인간 본성을 지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어떻게 서로 다른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선배들은 '질료(matter)'가 개별 존재를 구분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특정 형태(형상)를 지닌 특정 질료 덩어리가 하나의 개체를 만든다는 것이죠.
존 둔스 스코투스는 1266년경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던스(Duns)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문하여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며, 그의 예리하고 미묘한 논증 덕분에 '미묘한 박사(Subtle Doctor)'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당대의 주류였던 아퀴나스의 사상에 도전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무한한 힘, 그리고 개별 존재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1308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질료만으로는 개별 존재의 궁극적인 유일성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료는 끊임없이 변하며, 순수한 질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히 보편적 본질에 질료가 결합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긍정적이고 독자적인 무엇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바로 이것'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근거여야 했습니다.
'이것성(Haecceity)' 쉽게 이해하기
둔스 스코투스는 개체를 개체이게 하는 원리를 '이것성(Haecceit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라틴어 'haec'는 '이것'이라는 뜻으로, 'haecceitas'는 '이것임(thisness)' 혹은 '이것성'으로 번역됩니다. 이 개념은 보편적인 본질(예: 인간성, 말의 본질)과는 다릅니다.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특성이지만, '이것성'은 특정 개별 인간,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라는 특정 인간을 소크라테스이게 만드는 바로 그 '소크라테스성'입니다.
이것성(Haecceity)이란?
스코투스에 따르면, 어떤 존재의 '형상(form)'과 '질료(matter)'가 결합하여 보편적인 본질(nature)을 이룹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본질은 '인간의 형상'과 '질료'의 결합입니다. 하지만 이 본질은 수많은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에 스코투스는 이 본질을 '이 개체'로 만드는 궁극적인 '긍정적 형식'이 덧붙여진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성'입니다.
‘이것성’은 단순히 다른 개체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별 존재가 지닌 궁극적인 단일성(singularity)이자 구분 불가능성(indivisibility)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근거입니다.
수학에서 '2'라는 숫자는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2개의 사과'라고 할 때, 그 사과는 세상의 수많은 사과 중에서 '바로 이 사과들'입니다. '사과'라는 본질에 '이것성'이 더해져 '이 사과들'이 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똑같은 건축 설계도(보편적 본질)로 지어진 여러 건물(개별 존재)이 있을 때, 각 건물을 '바로 그 건물'로 만드는 미묘한 차이, 즉 건물의 위치, 지어진 시점, 특정 시멘트의 굳기, 심지어 건축가의 의도까지 포함된 궁극적인 특이성이 바로 '이것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오직 '이것'만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입니다.
이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둔스 스코투스의 '이것성'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대중문화, 소셜 미디어, 소비 사회 속에서 종종 '평균적인 나', '트렌드를 따르는 나'가 되기를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스코투스의 철학은 바로 이 '나'라는 존재가 단순한 통계적 평균이나 집단 속의 한 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유일무이한 '이것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1. 정체성 탐색: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넘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궁극적인 '이것성'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의 자아를 깊이 탐색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2. 다양성 존중: 모든 존재가 자신만의 '이것성'을 지닌다는 이해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인종, 성별, 취향 등 사회적 범주로 타인을 규정하기보다, 그들의 고유한 '이것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3. 인공지능과 개체성: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연 AI도 '이것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이 제기됩니다. 단순히 인간의 패턴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AI가 진정한 '자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는 로봇 공학 윤리와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4. 예술과 창의성: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메시지를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이것성'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예술은 보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개별 작품의 유일무이함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개체화 원리는 서양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난제였습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해답을 제시하며 이후의 철학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아퀴나스는 개체를 개체이게 하는 원리를 '질료(matter)'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본질은 동일하지만, 각각의 인간을 구성하는 '특정한 질료 덩어리'가 다르기 때문에 개별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스코투스는 이에 반대하여, 질료는 그 자체로 개체를 만들 수 없으며, 질료에 더해지는 긍정적인 '이것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플라톤 (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보편자(universals)'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보편적 형상을 실재의 근원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사물 안에 내재하는 '형상'을 강조했습니다. 스코투스는 이들의 통찰을 바탕으로, 보편적 본질이 개별 존재 안에서 어떻게 유일무이하게 구현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셈입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스코투스에게 '이것성'은 추상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개별 존재가 지닌 궁극적인 실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특정 사과를 볼 때 '이 사과'라고 즉각적으로 인식합니다. 이 '이것'이라는 인식의 근거가 바로 '이것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 포착되는 특성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사유를 통해 파악되는 형이상학적 원리입니다.
스코투스에게 '이것성'은 존재의 궁극적인 개별화 원리이므로,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이것성' 또한 존재합니다. 개체가 사라진다면(소멸한다면), 그 개체의 '이것성'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가 변하더라도 동일한 개체로 유지된다면(예: 어린 시절의 나, 늙어서의 나), 그 '이것성'은 변함없이 그 개체를 '나'이게 만드는 근거로 지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둔스 스코투스의 '이것성' 사유는 우리가 '나'라는 존재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거대한 보편성 속에서 개별 존재가 지닌 유일무이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인간' 중 하나가 아니라, 바로 당신만의 '이것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 역시 그러합니다.
오늘, 당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세요. 그들의 보편적인 특징을 넘어, 그들을 '바로 이것'으로 만드는 미묘하고도 강력한 '이것성'을 느껴보려 노력해 보세요. 이 작은 시도가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