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아파트. 한 노인이 푸들 ‘아트만’과 함께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평생을 고독 속에서 지냈고, 그의 철학은 ‘인생은 고통’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속삭였다. 그의 이름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 앞에 ‘염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갈망할까? 원하는 것을 얻어도 잠시뿐, 왜 이내 새로운 결핍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일까? 이 끊임없는 갈망과 허무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삶은 고통이고 권태다
• 욕망이 채워지면 새로운 욕망이 생기거나, 아무것도 갈망할 것이 없는 ‘권태’에 빠진다.
• 고통과 권태는 삶의 본질이며, 이를 인정하고 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예: 예술, 연민)가 유일한 위안이 될 수 있다.
2. 모든 욕망이 충족된 순간,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까, 아니면 또 다른 공허함에 빠질까?
3.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는 단순히 시간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가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일까?
쇼펜하우어는 왜 '삶은 고통'이라고 했을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의 개인적인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불화와 아버지의 죽음, 문학적인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고독한 삶을 보냈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했고, 특히 불교의 고통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대는 계몽주의와 이상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지만, 쇼펜하우어는 삶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며 독자적인 사유를 펼쳐나갔다.
쇼펜하우어는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헤겔과 같은 당대 주류 철학자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사회적 교류를 즐기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그의 푸들 '아트만'이었다. 그는 아트만에게 모든 속내를 털어놓았고, 종종 “나는 자네 없이는 살 수 없다네”라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에게 삶의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벗어나 오직 존재 자체로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아트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지'와 '고통', 그리고 '권태' 쉽게 이해하기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은 바로 '의지(Will)' 개념이다. 그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라고 보았다. 이 의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이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욕구의 총체다. 우리는 이 의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며, 그 끝없는 갈망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의지: 끊임없는 갈망의 원천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는 목적도, 이성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확장하려는 충동이다. 이는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저 '살고 싶다'는 의지에 이끌려 살아갈 뿐이다.
고통: 욕망과 결핍의 순환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한다. 배고픔을 느끼고, 사랑을 갈구하며, 성공을 추구한다. 이러한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에서 시작되며, 결핍은 곧 고통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고통은 잠시 사라지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평화일 뿐, 또 다른 욕망이 솟아나거나, 아예 욕망할 것이 없는 상태, 즉 '권태'가 찾아온다.
권태: 고통의 또 다른 얼굴
쇼펜하우어에게 권태는 고통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욕망이 충족되어 고통이 사라지면, 의지는 이제 활동할 대상을 잃고 공허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의미 없는 유흥이나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이는 또 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마치 시소를 타듯,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마치 거대한 '러닝머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달립니다(욕망하고 추구합니다). 잠시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면(욕망이 충족되면) 편안함을 느끼지만, 이내 러닝머신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가 지루하고 답답해집니다(권태). 결국 우리는 다시 달리거나(새로운 욕망), 다른 러닝머신으로 옮겨 타려 합니다. 이 끝나지 않는 달리기가 바로 쇼펜하우어가 본 삶의 본질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욕망한다.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며 끝없는 결핍감과 고통을 유발하고, 과도한 소비는 잠시의 만족 후 더 큰 공허함을 남긴다. 빠른 변화와 자극 속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면 느껴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며 살아간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예술적 관조를 통해 의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통해 나의 개별적 의지를 부정하고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동양의 금욕주의처럼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삶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비관적이지만, 오히려 삶의 본질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인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무력한 권태가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특성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고립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 '의지'의 존재 인정하기: 내 안의 끝없는 욕망과 갈증을 인지하고, 그것이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 예술적 관조의 가치: 영화, 음악, 미술 등 미적 경험을 통해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사물 자체를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기.
- 연민의 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는 행위는 나 자신의 개별적 의지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존재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삶의 고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많은 철학자가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했지만, 그는 삶의 고통과 허무함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 라이프니츠 vs. 쇼펜하우어: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가장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하며 낙관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지옥에도 더 비참한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이 세상일 것이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 니체 vs. 쇼펜하우어: 니체는 쇼펜하우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으나, 염세주의에 머물지 않고 '허무주의 극복'을 주장했다. 니체는 삶의 고통을 긍정하고 '생에의 의지(권력의지)'를 통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 칸트 vs.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물자체(Ding an sich)'를 인간의 맹목적인 '의지'로 해석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쇼펜하우어는 삶의 본질이 고통과 권태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단순히 우울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직시하고 헛된 기대를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고통을 덜어내는 방법을 모색하게 합니다.
그는 '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술적 관조(미적 체험), 타인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금욕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고통과 권태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에게 삶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이 냉엄한 현실 인식이 반드시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없는 욕망의 쳇바퀴에서 잠시 멈춰 서서, 진정한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고통과 권태가 삶의 본질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불가능한 행복을 쫓는 대신, 주어진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타인과 연대하며,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작은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쾌락과 고통, 그리고 권태의 순환 속에서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개인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의지'를 인지하고 현명하게 다루는 방법은 없을까요?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