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한 유명 인플루언서의 SNS 포스팅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그가 올린 사진은 특정 문화권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을 식용으로 조리한 모습이었죠. 한쪽에서는 "이것은 문화적 감수성 결여이자 동물 학대"라며 맹비난했고, 다른 쪽에서는 "개인의 자유이자 해당 문화의 전통"이라며 옹호했습니다. 댓글 창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저마다 '자신의 진리'를 외쳤습니다. 과연 진리란 무엇일까요?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인류 역사 내내 철학자들을 사로잡았던 근원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상대주의 vs 절대주의: 핵심 통찰 정리
• 이 두 관점은 도덕, 문화, 지식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 어떤 입장을 취하든, 타인의 '진리'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2. 다른 사람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가 충돌할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3. 보편적인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있을까요?
진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철학자들의 고민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따라서 진리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뜨거운 바람을 춥게 느끼는 사람과 따뜻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의 감각이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민주정의 황금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펴고, 광장에서 자유롭게 토론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수사학과 변론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 대신, '개인에게 유용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당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던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지점이었습니다.
반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 이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는 그의 정언명령은, 특정한 상황이나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평생 떠나지 않고 매일 같은 시간 산책하며 도시의 시계 역할을 했다는 칸트. 그의 삶은 오차 없는 기계처럼 정연했지만, 그 속에는 우주를 꿰뚫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정이 숨어있었습니다. 그에게 진리는 혼란스러운 경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견고한 토대였습니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쉽게 이해하기
결국, 이 논쟁은 '진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근본적인 시각으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진리가 보편적이고 불변하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절대주의(Absolutism)**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가 개인의 경험, 문화,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주의(Relativism)**입니다.
절대주의: 변하지 않는 북극성
절대주의는 마치 북극성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같은 자리에 빛나는 진리를 상정합니다.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나 문화적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쁘다"는 주장은 절대주의적 관점입니다.
수학의 원리: '1+1=2'는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진실입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도, 과거의 사람도, 미래의 사람도 이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절대주의적 진리의 좋은 예시입니다.
상대주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상대주의는 진리가 단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을 띨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 문화, 시대적 배경 등 특정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들'이 존재할 뿐 '단 하나의 진리'는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음식의 맛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은 상대주의적 관점입니다.
음악 취향: 어떤 이에게는 클래식 음악이 최고지만, 다른 이에게는 록 음악이 더 좋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으로 좋은 음악'인지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좋은 음악'이라는 진리는 개인의 선호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이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대립은 단순히 철학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문화적 다양성과 존중: 특정 문화의 관습이 '야만적'이라고 비난받을 때, 우리는 절대주의적 시각으로 타 문화를 재단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반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며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극단적 상대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같은 가치를 훼손할 위험도 있습니다.
SNS 시대의 '내로남불'과 '팩트체크': 소셜 미디어에서는 "이것이 나의 진실이다"라는 개인의 주장이 난무합니다. 이는 상대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죠. 하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에 대한 '팩트체크' 요구는 객관적 사실, 즉 절대적 진실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합니다.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예: 생명 존중)에 대해서는 절대주의에 가깝게 생각하고, 개인의 취향이나 문화적 차이(예: 음식, 패션)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죠. 이 두 관점의 균형을 이해하는 것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칸트와 프로타고라스,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만약 칸트와 프로타고라스가 한자리에 앉아 '진리'에 대해 토론했다면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요?
프로타고라스: "칸트 선생, 당신은 모두에게 통용되는 도덕 법칙을 말하지만, 세상엔 너무나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있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어떤 사회에서는 영웅시되고, 어떤 사회에서는 범죄가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과 이성이 서로 다른 진리를 만들어내는데, 어떻게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칸트: "프로타고라스 선생, 당신의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 경험만을 강조하여 혼돈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살인이나 강간 같은 명백한 악행조차도 '그 사람의 진리'라고 옹호해야 합니까? 인간 이성은 감각 경험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이성적 존재로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대화는 절대적 기준의 필요성과 개별적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을 보여줍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극단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상대주의자들은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대신, 특정 사회나 문화 안에서 합의된 규범과 가치를 통해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과 같은 가치는 상대주의의 한계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학은 객관적 증거와 재현 가능한 실험을 통해 '진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과학적 진리 역시 시대와 관찰 방식의 한계 속에서 '잠정적인 진실'로 존재하며, 새로운 발견에 의해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구 중심설이 진리였지만,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태양 중심설로 대체되었듯 말입니다. 이는 과학적 진리 또한 어떤 면에서는 상대적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진리가 하나인지, 아니면 여럿인지에 대한 질문은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절대주의는 우리에게 견고한 기준과 질서를 제공하지만, 경직성으로 인해 타 문화를 배척하거나 독단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주지만,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혼란과 무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때로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가치를 붙들고, 때로는 타인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나의 기준을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단 하나의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양한 관점을 탐색하며, 스스로의 사유를 확장해나가는 여정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오늘 만난 누군가의 '진리'를 어디까지 존중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