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어느 한적한 정원에서 절규했습니다. 그는 쾌락과 죄악에 찌든 지난 삶을 후회하며, 깨달음의 빛이 자신을 이끌고 있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는 나약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내일, 내일' 할 것인가? 왜 지금 당장 끝내지 못하는가?" 그의 뇌리 속에서 속삭이는 이 비탄은, 오랜 시간 그를 짓눌러온 자유의지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뇌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왜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반복할까요? 만약 우리가 선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을 걸을까요? 그리고 만약 신의 은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우리 인간의 노력과 책임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 진정한 자유(죄로부터의 자유)는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인간의 책임은 은총을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하는 데 있으며, 이 선택이 구원의 중요한 열쇠이다.
2. 타인의 도움이나 '운명'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이 내 삶을 변화시켰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적인 선택의 결과일까?
3.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나쁜 선택에 대해 어디까지 비난하고, 어디부터 '불가피했다'고 인정해야 할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의 철학은 그의 격정적인 삶의 궤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학문과 쾌락을 탐닉하며 방황했습니다. 당시 그는 세상의 악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원론적 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의 두 가지 독립적인 원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보았고, 악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악한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그가 짓는 죄악을 자신만의 책임이 아닌, 외부적인 요인으로 돌릴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와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 그리고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접하며 점차 진리를 찾아갔습니다. 특히 밀라노의 정원에서의 극적인 회심은 그의 사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힘(성서 구절)에 이끌려 변화를 체험했고, 이는 인간의 나약한 의지와 강력한 신의 은총에 대한 그의 이해를 심화시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전의 유명한 기도는 그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줍니다. "주여, 제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다만 지금 당장은 말고요!(Da mihi castitatem et continentiam, sed noli modo!)" 이 기도는 인간이 선을 갈망하면서도 죄에 쉽게 넘어지는 나약한 의지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동시에 신의 은총이 없이는 진정한 변화가 어렵다는 그의 후기 사상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자유의지, 원죄, 그리고 은총 쉽게 이해하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깊어집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선을 행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의지가 원죄로 인해 깊이 병들었음을 역설했습니다.
자유의지 (Liberum Arbitrium)와 진정한 자유 (Libertas)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는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로운 선택' 그 자체였습니다. 이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며, 인간이 죄를 짓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입니다. 신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기에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택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지만, 죄의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하고,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자유의지의 병듦' 또는 '죄의 노예가 된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마치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의 사슬에 묶여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의 은총 (Gratia Divina)의 필요성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은총(Gratia Divina)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은총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 없이, 오직 신의 자비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총만이 병든 자유의지를 치유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 즉 진정한 자유(Libertas)를 회복시켜 줍니다.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 자유로워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운전대'와 같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능력은 원래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죄로 인해 엔진에 심각한 고장이 나버렸다고 상상해보세요. 운전대는 여전히 우리 손에 있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거나,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자꾸만 엉뚱한 길로 들어섭니다. 이때 신의 은총은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고, 우리가 운전대를 잡고 원하는 목적지(선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수리공의 기술'과 같습니다. 우리는 운전대를 여전히 잡고 있지만, 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면 된다'는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계발에 실패하고,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죄를 반복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중독이나 악습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나는 나약하다'고 느끼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외부의 도움(치료, 공동체의 지지, 정신적/영적 가이드 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은총'의 현대적 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외부의 '은총'적인 도움(신이든, 타인이든, 시스템이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겪는 어려움이 나의 의지 부족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받아들여야 할 도움의 손길은 무엇일까?' 이는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자세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와 은총에 대한 사상은 이후 서양 철학과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대척점은 그의 동시대 인물인 펠라기우스(Pelagius)였습니다.
펠라기우스: "인간은 원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으며,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며,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선행에 달려 있다. 신의 은총은 단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돕는 빛이나 율법일 뿐, 우리 의지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니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병들었으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오직 신의 불가항력적인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 이 은총은 우리의 의지를 회복시켜 선을 택하게 만든다."
이러한 대화는 인간의 능력과 신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특히 칼뱅)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면 가톨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더 강조하는 균형 잡힌 입장을 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예지(foreknowledge)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신은 우리가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지 미리 알지만, 그 선택을 강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친구가 특정 결정을 할 것이라고 예측해도 그 친구의 결정을 강제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신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미리 아는 것이지,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이 인간의 노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고 노력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은총은 우리가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며, 그 능력으로 우리가 선을 행할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신은 우리의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일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이 뇌 활동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한 '병든 자유의지'의 물리적 버전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단순한 생물학적 결정론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영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은총'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를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과 깊은 고뇌를 통해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념을 엮어냈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무한한 자비와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통해, 단순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자유로 여기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를 탐구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혹은 '나는 왜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하고 자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자책감 속에서도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그리고 우리를 넘어선 어떤 도움(은총)이 존재하며, 그 도움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음을 속삭이는 듯합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가장 큰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살면서 '내가 원했지만 할 수 없었던 일'과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일'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시나요? 그리고 이 두 경험이 당신의 '자유'에 대한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