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유럽, 아랍 세계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다시금 기독교 문명에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였습니다. 그의 논리학, 자연 과학, 형이상학은 경이로웠지만, 동시에 교회의 기존 사상과는 충돌하는 듯 보였죠. '이교도의 지혜'가 '신의 진리'를 흔들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졌습니다. 혼란 속에서, 한 조용하지만 거대한 지성을 가진 인물이 이 두 거대한 흐름을 하나로 엮어내려는 대담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성과 신앙의 위대한 종합
• 그의 핵심 통찰은 이성과 신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신앙을 뒷받침하고 신앙이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 종합은 서구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2. 과학적 사실과 개인적인 믿음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3.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가치들이, 단순히 종교적 명령이 아니라 보편적 이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학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서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 아랍 학자들을 통해 재도입되면서 지적 혁명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였으나, 그가 이교도였기에 기독교 사상과는 많은 부분에서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경계하거나 심지어 배척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치를 깊이 이해했고, 이성과 신앙이 각각 다른 영역의 진리를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진리로 수렴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신의 진리가 이성을 통해 밝혀질 수 있으며, 이성이 신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덩치와 과묵한 성격 때문에 동료 학생들에게 '벙어리 황소(Dumb Ox)'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아퀴나스의 탁월한 지성을 알아보고 "너희는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르지만, 언젠가 그의 포효가 온 세상을 뒤흔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생애는 고독한 사유와 엄청난 저술 활동으로 채워졌으며, 평생의 역작 <신학대전>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의 위대한 종합을 이뤄냈습니다.
아퀴나스의 '이성적 신앙' 쉽게 이해하기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통합한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자연법'과 '신의 존재 증명(다섯 가지 길)'이 대표적입니다.
자연법(Natural Law)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 만물에는 고유한 목적(telos)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퀴나스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용하여 '자연법'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내재된 질서, 즉 신의 영원한 법의 일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않는 것, 생명을 보존하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 등은 특별한 종교적 계시 없이도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나쁘다'고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아퀴나스는 이것이 단순히 사회적 약속이나 종교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이성이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자연법'의 일부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로서 생명을 보존하고, 지식을 추구하며,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본성적으로 옳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죠.
신의 존재 증명: '다섯 가지 길'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서 '부동의 원동자(Prime Mover)'를 주장했습니다. 아퀴나스는 이 개념을 차용하여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이 증명들은 경험 세계에서 출발하여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신의 존재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의 모든 움직임에는 원동자가 필요하고, 이 원동자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아퀴나스는 이 '부동의 원동자'가 곧 우리가 믿는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아퀴나스의 사상은 단순히 중세 시대의 유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과학적 합리주의와 종교적 신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의 통합적 사고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이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고 심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아퀴나스의 사유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으며, 반대로 신앙적 관점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도덕적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과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넘어선 '건설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아퀴나스의 사유는 우리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직면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인문학과 자연과학, 감성과 이성, 전통과 혁신 등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영역들을 어떻게 하면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조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 안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이 어떻게 함께 공존하며 더 큰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성찰해볼 수 있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퀴나스의 철학은 중세 시대뿐 아니라 이후의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사상적 위치는 가히 독보적이지만, 그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vs. 아퀴나스): 아퀴나스 이전의 서구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주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우선하며, 신의 은총 없이는 진정한 지혜를 얻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적, 이성 중심적 접근을 도입하여, 이성 자체의 능력과 자연 세계의 가치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완성시키는 것이지, 이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죠.
이마누엘 칸트 (vs.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근대 철학자 칸트는 아퀴나스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들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경험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이성적 증명은 불가능하며, 신의 존재는 이론적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 이성의 요청(도덕적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볼 질문들
현대 사회는 다원화되어 보편적인 도덕 원리를 찾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 문제, 인권 문제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자연법의 개념은 다시금 주목받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도출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란 무엇인지, 그리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이 있는지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퀴나스 시대에는 현대와 같은 '과학' 개념이 없었지만, 그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신앙과 조화시키려 한 시도는 오늘날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큰 영감을 줍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이 각각 다른 영역에서 진리를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진리에 도달한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이해를 심화시키고, 종교적 관점이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함께 생각해보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교도 철학자'의 지혜를 기독교 신앙의 거대한 성전 안으로 끌어들여,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견고한 사상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영역들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통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단절된 시대를 넘어,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기 쉬운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입니다.
우리 삶에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가치(예: 효율성 vs. 윤리, 개인의 자유 vs. 공동체의 안정)가 있다면, 아퀴나스처럼 그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과정에서 당신만의 '지적 종합'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철학적 사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며, 여러분만의 생각과 성찰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해보고, 스스로 질문하며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입니다.